환영합니다! 자세히보기

오늘의 모바일/오늘의 시사

인사이드 아웃 감상문. 사회는 왜 무한 긍정주의를 원하는가?

입킷 Ipkit 2016. 6. 27. 10:00

광고차단이 감지 되었습니다.

 광고차단을 해제하여 저를 지원해주세요!

플러그인을 해제한 후 새로고침(F5)를 해주세요.

반응형

긍정을 요구하는 사회 – 인사이드 아웃

인사이드 아웃 감상문과 줄거리

인사이드 아웃

감독 : 피트 닥터, 로니 델카르멘

제작 :  픽사, 디즈니

국내 개봉일 : 2015년 7월 9일

줄거리 : 라일리는 어느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 꼬마아이 이다.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감정이 생기고, 라일리 속에는 감정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5가지 감정캐릭터들로 기쁨이, 슬픔이, 소심이, 까칠이, 버럭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감정들이 있는 곳은 본부라고 불린다. 본부 밖에는 무한한 공간이 존재한다. 라일리가 느끼는 것, 보는 것 등은 감정과 상호작용한다. 라일리가 겪는 상황에 따라 각각의 감정들이 라일리를 통해 표출되고 그 상황은 구슬모양의 기억으로 저장되며 각 감정에 따라 구슬의 색이 다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핵심기억으로 저장되며, 본부 밖에 빛나는 인격의 섬을 만든다.

라일리가 11살 되던 해, 라일리의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되고 그 과정 중에 수많은 기억과 감정 간의 충돌이 시작된다. 그 중 슬픔이와 기쁨이의 충돌이 가장 잦은데, 슬픔이는 라일리를 슬프게 만든다. 슬픔이도 자신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자책한다. 기쁨이는 최대한 라일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슬픔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한다.

이사 후 전학한 학교에 간 라일리가 즐겁게 자기소개를 하고 있을 때 슬픔이가 기억을 만지게 되어 라일리는 결국 울음을 터트린다. 이내 그 상황이 푸른빛의 슬픈 핵심기억으로 저장 되자 기쁨이는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와 같은 장치를 통해 본부 밖으로 버리려고 한다. 이에 슬픔이는 핵심기억을 버리려는 기쁨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도중에 노란빛의 기쁜 핵심기억이 떨어지고, 빛나던 인격의 섬도 어두워졌다. 기쁨이가 떨어진 노란빛 핵심기억을 황급히 잡으려다가 슬픔이,핵심기억과 함께 장치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본부에는 핵심기억도 없고 까칠이, 소심이, 버럭이만 남았다. 라일리는 모든 것에 퉁명스럽게 대하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본부 밖 장기기억 저장소로 이동된 기쁨이와 슬픔이는 본부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하루 만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 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빙봉이라는 어린 라일리의 상상 속 친구를 만나게 되고, 빙봉은 본부로 가는 기차를 알려주고 함께 기차를 타게 되었다. 한편 본부에서는 버럭이와 까칠이가 방황을 시작했다. 그렇게 라일리의 방황으로 기찻길이 무너지고 인격의 섬과 장기기억 저장소가 파괴된다. 기쁨이와 빙봉은 잊힐 기억 더미에 추락하여 갇히게 돼, 절망에 빠진다. 그 속에서 기쁨이는 자신이 버린 푸른빛 핵심기억을 보게 된다. 기쁨이는 푸른빛에서 노란빛으로 변한 핵심기억을 보게 된다. 이로 인해 기쁨과 슬픔이 서로 공존하고 슬픔이 있었기에 기쁨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빠져 나가려고 한다. 끝내 기쁨이는 빙봉의 희생으로 잊힐 기억더미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다.

라일리의 방황이 가출로 이어지자 본부에 있는 감정조종판과 인격 자체가 파괴되려고 한다. 본부에 있는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가 감정조종판을 고치려고 하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한편 슬픔이는 자신 때문에 라일리가 불행해졌다며 울면서 자책하고 기쁨이를 피하게 된다. 기쁨이는 기지를 발휘해 슬픔이와 함께 본부의 창문 깨고 돌아오게 된다. 본부로 돌아온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라일리는 네가 필요하다며 격려하고, 감정조종판을 고쳐보라고 한다. 슬픔이가 감정조종판을 만지자 원래 상태로 돌아왔고, 이내 라일리도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라일리는 보는 슬픔이에게 기쁨이가 갖고 있던 노란빛 핵심기억을 슬픔이에게 건네준다. 슬픔이는 건네받은 핵심기억을 회상하기 시작하고 라일리는 이사하기 전 생활이 그립다는 속마음을 부모님께 털어놓는다. 부모님도 라일리에게 자신도 그러하다는 속마음을 듣게 되자, 푸른빛과 노란빛이 섞여있는 새로운 핵심기억이 생긴다. 인격의 섬은 전보다 다양하고 더 크게 형성되었다. 또한 이제 모든 기억은 하나의 감정이 아닌 2개 이상의 감정이 섞인 채로 저장되기 시작했다. 12살이 된 라일리는 사춘기라는 또 한 번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예고하며 영화가 막을 내린다.

*



기쁨의 감정들

감정 캐릭터들은 서로 피부색과 머리색이 다르다. 그 중 기쁨이만 피부색과 머리색이 다르다. 피부색은 노란색이지만 머리색은 슬픔이와 같은 파란색이다. 이는 기쁨과 슬픔의 공존과 더 나아가 감정의 축이 된다는 것을 영화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기쁨은 다양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너무 기뻐서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 울고 나면 후련해지는 기분,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골탕 먹였을 때 통쾌함 등 기쁜 감정의 일부분이 된다. 기쁨이는 까칠이와 버럭이가 감정을 표출하려고 할 때 중재하여 참게하고 슬픔이가 슬픈 기억을 회상하지 못하게 저지하는 등 모든 감정에 관여한다.

기쁨의 감정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겪더라도 기쁨의 감정으로 잊게 해준다. 가령 여자 친구와 싸워서 기분이 안 좋다. 그럴 때 모든 걸 잊고 노래를 부르거나, 게임을 하거나, 친구와 술을 마시는 등 즐거운 것을 하면 그 기분이 사그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기쁨의 감정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보호해준다. 이처럼 기쁨이가 모든 감정에 대해 관여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보호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 기쁨이가 슬픔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러한 기쁨이 장기적으로 이어질 때, 풀지 못한 문제들이 곪아 터지게 된다. 결국 기쁜 감정으로 덮는 것은 응급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라일리가 기쁨으로 감정을 억누르게 된 것은 가정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엄마와 아빠의 감정캐릭터들도 나와 있는데 그들을 이끄는 감정은 기쁨이가 아니었다. 이것으로 기쁨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결코 가족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한 것은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삶의 공식을 주입한 것이다.


곪아터진 삶의 공식

응급조치로 기쁜 감정만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기쁨이는 본능적으로 슬픔이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기쁨이는 슬픔이에게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라고 하지만 슬픔이는 같은 기억을 회상해도 슬펐던 기억을 회상한다. 끝내 슬픔이는 눈물을 흘리는데, 기쁨이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슬픔이는 바뀌지 않는다. 기쁨이가 슬픔이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슬픔이의 영향력이 커지고, 다른 감정 캐릭터들과 달리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이는 자신의 잣대로 슬픔이에게 가르치려고 하지만, 슬픔이에게 통하지 않는다.

지난 2015년 5월에 발생한 메르스사태는 보건당국의 오판으로 막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큰 패착은 보건당국의 정보차단이다. 초기에 과도한 불안이나 오해를 막기 위해 메르스 정보를 차단했고, 메르스 확진자가 다녀간 병원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3차 감염자를 발생시킨 대참사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민들의 불안과 유언비어를 막고자 정보를 차단하여 국민들을 안심하게 했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환자는 늘어나게 되고, 소셜 미디어 상에는 진위가 불가능한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예방 가능했던 메르스는 38명이 숨지고 168명이 감염된 것으로 끝이 났다. 이렇게 국가에서도 기쁨이처럼 국민들의 감정을 차단했었다. 결국 영화에 기쁨이가 슬픔이를 바꾸려고 해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정부도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막을 수 없었다. 부정적 요소를 방지하고자 긍정적으로 무마하려던 보건당국의 오판으로 전 국민이 ‘중동에서 유행하는 질병’에 벌벌 떨어야만 했다.


내가 아닌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낙천적인 사람과 낙관적인 사람 중 고르라고 하면 백이면 백 전자를 선택할 것 이다. 세상에 낙천적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대화가 잘 통하며, 곁에 있으면 힘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회는 대인관계를 중요시하고 이에 필요한 것은 낙천적이고 마인드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이어진다.

사회가 좋아하는 틀에 얽매여 부정적인 것긍정적인 것이 좋고 나쁜 것으로 나뉘어졌고, 내 감정마저 내 자신도 모르게 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삼킨 감정들은 곪아 썩어 문드러지게 되어 결국 탈이 나게 되어 있다. 영화에서 슬픔이도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누적된 부정적인 감정들은 세상 밖으로 표출된다. 그것은 덩어리째 표출되어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도 스트레스를 피하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끝에는 쌓아놓은 화를 토해내거나, 그 화를 삭이려다 우울함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진다. 이러한 삶은 전혀 좋지 못한 삶이다.

삶이 더 건강해지려면 우리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 그에 따른 결과로 사회도 같이 건강해진다. 부정적인 사람에게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결국엔 부정적일 때가 있다. 사회가 원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고 낙천주의자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은 포장된 자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가식으로 만들어진 부패된 사회를 낳게 될 것이다.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아닌 유일한 솔직한 ‘나’가 되어야 한다.


* 이 문서를 대학교 과제로 제출할 시 낮은 확률로 낙제를 받을 수 있음

반응형